(一八三四~一九○六) 본관 교동 字汝行 호는 三山、시호 孝靖、始祖 석성부원군 璫의 十七世孫(顯祖) 德山派祖 三錫의 十一世孫、父衡相、충남 禮山 出身. 어렸을 때부터 언행이 다른 아이들과 달라 친구들과 놀 때에도 “우리의 몸은 부모께서 끼친 것이니 다쳐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좀 자라서는 부모에게 조석으로 문안드리며 그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十二세 때 부친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서러워한 나머지 수차 기절하였고 초상 장례를 예에 따라 깍듯이 치르니 三년상을 마치고 나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 홀로 계신 모친을 모시는데 품을 팔아서 쌀을 사고 반찬을 사서 극진히 공양하니 마을 사람들이 董永의 貸錢、子路의 負米、黃香의 扇枕 등을 말로만 들었더니 이제 실제로 보았다고 하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二十세 때 성주배씨를 아내로 맞아 부부 합심하여 편모를 지성으로 모셨고 一八五七년 겨울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부부가 합심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해 드리는 한편 뒷산 정결한 곳에 단을 쌓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열흘 밤을 정성껏 기도 드렸다. 기도가 끝나는 날 모친의 꿈에 한 노인이 문병 왔다가 돌아가더니 그 후로 병이 나았다. 그 후로 매년 정월 초에는 부부가 함께 그 곳에 가서 모친의 수를 빌어 모친은 그 후 十七년을 더 살다가 一八七三년 다시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백약이 무효하고 닷새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떴다. 부부가 함께 애통해 하다가 부인은 그로 하여 병을 얻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니 홀몸으로 삼년상을 극진히 치렀다. 그가 죽은 후 아들 희배(熙培)가 八년간 묘소자리를 구하더니 우연히 명사(名師) 노병용(盧秉庸)을 만나 그가 묘 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그 곳이 바로 전에 기도드리느라 쌓았던 단이 있던 곳이었다. 이 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그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에 부인 배씨는 정경부인에 증직되었으며 一九二七년 慕聖尊道院大成文藝京約所에서 통문을 돌려 충남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에 부부쌍효각(夫婦雙孝閣)이 세워졌다. 효부 배씨는 一八四三年에 나서 一八七四年에 별세했고 아버지는 은모(殷模)이며 顯祖玄慶의 후손이다. 현재 낙상리 그 마을에 증손 광수(光洙)가 살고 있고 또 증손 봉수(㵯洙)는 서산군 해미면 전천리에 살고 있다.